다시 어린이가 되어

전금주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3/10/19 [11:42]

다시 어린이가 되어

전금주 칼럼리스트 | 입력 : 2023/10/19 [11:42]

▲ 마오 전금주  ©시사포스트

어느 깊어가는 가을날이었다. 전날같이 근무하는 젊은 사람들과 족구시합을 하고 난 후, 피로에 쌓여 비교적 이른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피곤하다는 의식조차 할 수 없으련만, 나이가 듦에 따라 피로도가 올라가니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피곤하다든지 전날 어떤 일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면 그 일이 꿈에 나타난다고 한다. 어젯밤 잠결의 꿈속에 어떤 산을 등반하고 있었다. 그 산은 제주도의 한라산과 비슷한 높이의 산으로 다가왔고, 가을인데도 산 높이에 따라 사계절을 다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의 산이었다.

 

산에 올라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한참 걷다 보니 평탄한 길과 험악한 길, 자갈길과 풀밭이 이어지는 길, 깊은 계곡과 평야 지대의 냇가 모습의 물길 등 여러 모습의 지형이 눈에 다가왔다. 꽃과 나비가 평화롭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평원도 있고, 각종 나무로 우거진 숲과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곳도 있었다.

 

평탄한 길을 한참 걷다가 방심하는 사이 갑자기 험한 자갈길이 나타나 사고를 당할 뻔하였다. 또 바로 옆에 깊은 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무심코 지나가다가 발을 헛디뎌 빠진 다음에는 정신을 집중하여 조심스럽게 건너기도 하였다.

 

인생의 여러 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생의 과정을 영어로 “Ups and Downs”라고 하는가 보다. 바로 앞에 꿈에서 본 산과 강과 평야의 굴곡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던가! 도인들은 어려울 때는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고, 행복할 때는 언젠가 다가올 불행한 순간을 떠올리며 인내하며 심신을 조화롭게 하면서 산다고 하지 않는가!

 

많은 종교에서도 사람이 어떤 분야의 경지에 이르려면 많은 고난과 역경을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라톤을 보더라도 피눈물 나는 훈련이 있어야 그것에 익숙해지고, 또 더욱더 잘 달리는 방법 등을 연구하여 훈련에 도입하고 정신력과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비로소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닐까.

 

등반을 끝내고 거의 집 가까이 이를 즈음이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곡식이 거의 다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추수할 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변 밭의 참깨와 콩은 이미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알곡만 빼곡히 줄기에 줄지어 매달려 있고, 옥수수는 이미 자기 것을 다 빼앗긴 채 마른 잎사귀만 바람에 나부끼며 마지막 진혼곡(鎭魂曲)을 연주하고 있었다.

 

밭 가의 밤나무도 잎은 물론 밤 알 하나 남기지 않고 거의 알몸인 상태로 주위 나무들과 수줍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감나무는 잎사귀를 다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에 수백 개의 방울을 달고 사람과 새와 짐승들이 가져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초목들의 모습을 보다가, 내 것은 아니지만 뭔가 수확을 하고 싶은 마음이 동해 어릴 적 어머님이 정성 들여 경작하던 고추와 가지와 오이가 심어졌던 밭에 이르렀다. 오이는 이미 흔적을 감추었다. 가지는 몇 개 대롱대롱 줄기에 붙어 있었다. 씨앗용으로 쓰려고 남겨놓은 노랗게 늙고 쪼그라진 것들이었다. 그중 색깔이 좋은 잘 여문 가지 하나를 땄다. 잘 생기고 껍질의 색깔도 좋다고 생각하고, 배낭 옆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향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뭔가 이상하여 주머니에서 가지를 꺼내 옆구리를 만져보았다.

 

그런데, 아이고, 이게 웬일인가! 만져보니 껍질이 살짝 터지면서 뭔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쉬파리 알인 구더기인 것 같았다.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덩어리로 줄줄이 나온다. 계속 털어냈지만 연이어 나온다. 그것들을 털다가 마냥 다 털어내지 못하고 가지를 공중에 내팽개치고 잠에서 깨었다.

 

대개의 꿈은 잠에서 깨면 바로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어젯밤의 꿈은 뇌리에 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두어야지 생각하고 이 글을 남긴다. 어젯밤 꿈이 마치 우리네 인생의 지나온 길과 같고, 특히 가지의 구더기 이야기는 불현듯 내 인생의 지나온 과거의 삶의 흔적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섬쩍지근하였다.

 

이제껏 나름대로 살아온 과정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살려고 마음먹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양식이 될 좋은 책 많이 읽으려 노력했고, 늘 자식들 위하는 사랑하는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작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려 했고,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도 흘렸고, 직장에서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근무하려 했고… 아무리 꿈속의 이야기지만 내 맘속에 여태껏 구더기, 즉 죄만 키우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서럽기도 하였다. 내 자신이 완전히 죄 덩어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털어도 또 털어도 털어지지 않는 죄, 죄, 또 죄…

 

마침 아침에 일어나 금방 또 떠오른 것이 성경의 잠언 22장 1절 말씀이었다. 알다시피 잠언은 31장으로 되어 있다. 한 달은 30일 내지 31일이기 때문에, 어느 날짜나 그 날짜에 해당하는 장을 따라 읽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은 22일이라서 22장을 읽었다. 명예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인조복(譽人造福)이란 말이 있다.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사랑하여 명예롭게 하면 나 자신에게 복이 돌아온다는 뜻의 말일 것이다. 나는 얼마나 명예롭게 살았는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살아왔는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정과 사랑을 펼치며 살아왔는가.

 

인간이기에 다시 죄를 짓겠지만, 이제부터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떨치고 거룩하게 살자고 다짐해본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라는 말은 ‘남과 다르다’는 의미다. 이제부터라도 남과 다르게 사는 거다. 바로 당장 어제 누군가로부터 연말 식사 한 끼 하라고 건네받은 작은 봉투 하나를 상대방을 불러 정중히 말씀드리고 돌려주자.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죄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 맹세한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던가!

 

이제 다시 태어나 가지 속을 튼실한 씨앗으로 가득 채워, 그 씨앗 하나하나가 세상에 나가 온 세상이 하나 되게 하는 구실을 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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