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이원익 선생이 그립다

김성윤 부산본부장 | 기사입력 2025/01/30 [19:26]

조선의 이원익 선생이 그립다

김성윤 부산본부장 | 입력 : 2025/01/30 [19:26]

▲ 김성윤 부산본부장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부 여당은 윤 대통령의 계엄에 대해 책임 있게 나서는 사람은 없고, 눈치만 보는 사람들뿐이다.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파격적인 진급으로 현지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발령됐다.

 

어느 조직이든 진급으로 내려온 인물, 특히 파격적인 진급자를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주는 조직은 드물다. 그러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 앞에 서게 됐다.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라고 외쳐댔다. ​문무백관들은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소하며 임금(선조도 속으로는 동조 함)을 압박했다.

 

이순신을 발탁하여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류성룡까지도 “공은 공, 사는 사”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이순신의 형 집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 이원익(1547~1634)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이원익의 승낙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도 후대에 길이 남을 만한 명 대사로 임금에게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이 말 한마디에 선조도 체념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99대 1로 이원익의 승으로 마무리했다. 선조는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하고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됐다. 199명의 문무백관을 이원익 한 사람이 반대하여 이순신을 살려냈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든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이원익 대감은 죽는 날까지도 초가집에서 살았던 명재상이다.

 

이렇게 세월이 수없이 변해도 정치는 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정치인들이 부끄러운 생각을 못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 온갖 시기 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까지 간 만고의 충신을 이순신을 199대 1로 살려낸 이원익 대감 같은 인물이 현시대에 간절히 그립기만 하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이원익 대감 같은 인물이다. 지금 이러한 정치인이 있다면 국민은 행복할 것이다.

 

​이원익 대감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면서 자식들을 불러 놓고 유언했다.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이 그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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