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묵언으로 용서를 구하다

강종한 충북본부장 | 기사입력 2025/08/04 [13:37]

국가에 묵언으로 용서를 구하다

강종한 충북본부장 | 입력 : 2025/08/04 [13:37]

▲ 시사포스트 강종한 충북본부장 

여름이면 어김없이 수박이 생각난다. 그리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 ‘씨 없는 수박’의 주인공 우장춘 박사(1898~1959)이다. 우 박사는 한국 농업에 크고 깊은 유산을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우 박사는 평생 친일이라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그를 이해하려면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던 날, 일본 공사 미우라와 자객들에게 황후의 거처를 안내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범선 별기군 대대장이다. 황궁을 지켜야 할 그가 오히려 적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다. 보복이 두려웠던 그는 결국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일본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우장춘 박사다.

 

우범선은 우장춘 박사가 여섯 살 되던 해, 조선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일본인 어머니의 헌신 속에서 성장했지만, 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에 취직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에게 국적 변경과 성씨 개명을 요구했고, 그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농림성을 떠나 도키이 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농업은 척박했다. 채소와 과일의 종자조차 대부분 외국에 의존해야 할 만큼, 기반은 열악했다. 그 무렵, 정부는 우장춘 박사가 종자 개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귀국을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어머니와 아내, 자식을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귀국했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부임한 그는 오로지 연구에 몰두했다. 정부가 이적비 명목으로 건넨 100만 엔도 생활비가 아닌 우량종자 구입에 사용했다. 그의 노력은 마침내, 제주도 감귤, 강원도 씨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와 배추 종자를 개발하는 결실을 맺었고, 이는 한국 농업 발전에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우장춘 박사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고사하고 종자 개발에 평생을 바쳤다. 그 공로로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되었고, 상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라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처럼 우장춘 박사는 묵묵히 연구에 전념하여, 농업 발전에 기여하는 결실을 맺음으로써, 국가에 아버지의 과오를 대신해 용서를 구했다. 그 침묵은 사죄였고, 그의 삶은 참회의 실천이었다.

강종한 충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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