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광복 80주년이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피 끓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골목마다 태극기가 펄럭였고, 사람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기쁨을 나눴다. 그러나 환희의 이면에는 혼란과 불안이 공존했다.
일본군과 경찰은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있었고,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권력은 공백상태였다. 청년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각자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고, 거리에는 함성과 격렬한 논쟁이 뒤섞였다. 해방의 기쁨과 새로운 체제를 둘러싼 혼돈이 한 공간에서 교차했다.
38선 북쪽 평양은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소련군의 지휘 아래 김일성을 내세워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이 신속히 진행됐다. 북은 빠르게 체계를 갖춰서 갔고, 이 과정에서 남북 분단의 씨앗이 뿌려졌다. 오늘날 분단의 책임을 외세에 돌리지만, 준비도 힘도 부족했던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독립전쟁의 주체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상하이와 충칭에서 명맥을 이어가던 임시정부는 국제 정세의 거센 물결 앞에서 외교를 펼치기에 역부족이었다. 김구 선생은 장제스를 설득해 1943년 카이로 회담 선언문에 ‘한국은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문구를 담게 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 국제 질서는 냉혹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며 한반도 북부를 빠르게 장악했고, 미국은 준비 없이 38선을 제안했다. 결국 남북이 갈라지는 비극이 시작됐다.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김구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이번 전쟁에 기여한 바가 없으니, 국제 무대에서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만약 광복군이 일본군과 직접 교전해 조선을 해방시켰다면, 우리는 승전국으로서 당당히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 무렵,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이승만 박사가 해방 이후 한국 정치의 중심 무대로 복귀했다. 그는 미군정과 협력해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힘썼고, 통일정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반면 김구 선생은 끝까지 민족 통일을 꿈꾸며 1948년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담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그해 5월 남한 단독 총선과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분단은 현실이 됐다. 이승만 박사의 선택은 냉전 초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지만, 분단 고착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광복절은 단지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우리 힘의 부족으로 분단이 시작된 운명의 날이기도 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날의 선택 위에 서 있다. 외세의 협상 테이블이 아닌, 우리의 힘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나라가 돼야 한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오늘, 이웃나라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기원해 본다. 그것이 진정한 자주와 독립의 길이다. <저작권자 ⓒ 시사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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